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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Strategy (AI 비즈니스 전략)

멸종 전야의 낙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AI를 만들지 못했다면,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파도를 탈 기회가 아직 있다—기본소득이 당신을 구하러 오기 전까지는."

어느 뉴스레터에서 읽은 문장이다. 톨킨의 '절대 반지'를 패러디한 농담 같았지만, 웃기지 않았다.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요즘 AI 업계 소식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OpenAI, Google, Anthropic—이들이 쏟아내는 발표는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오는 뉴스 같다. 수십조 원의 투자, 수천 명의 박사급 연구진,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거창한 선언들. 그 옆에서 나는 작은 회사의 POC 일정을 맞추느라 새벽까지 코드를 고치고 있다.

같은 산업에 있다고 말하기 민망한 격차다.

창업가로서 '멸종'이라는 단어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가 몇 달 걸려 만든 기능을, 그들은 다음 업데이트에 기본 탑재해버린다. API 가격이 반으로 떨어지면 우리의 마진도 함께 증발한다. 범용 AI가 점점 똑똑해지면, 도메인 특화 솔루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될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면, 밤이 길어진다.


그런데 낮에는 다른 현실이 있다.

지금 나는 제조 현장의 문제를 풀고 있다. 수십 년간 쌓인 도면들—캐비닛에 꽂혀 있거나, 이름 규칙 없이 서버 어딘가에 흩어져 있는 것들. 엔지니어가 "예전에 비슷한 거 했는데..."라며 기억을 더듬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VLM으로 도면을 읽고, 유사한 과거 도면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동하면 며칠 걸리던 작업이 몇 분으로 줄어든다.

공정 관리도 마찬가지다. Primavera P6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여러 통계,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분석하고, 강화학습으로 최적 대응 시점을 찾는다. 지연이 터진 다음에 수습하는 게 아니라, 터지기 전에 알려주는 것. 현장 담당자가 "이거 진짜 되네요?"라고 물을 때의 표정이 좋다.

나라장터를 훑는 에이전트도 만들었다. 매일 아침 우리 회사에 맞는 입찰 공고를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준다. 거창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는 동안 이 작은 에이전트가 일하고, 아침에 결과를 건네준다. 그 메일을 열 때마다 묘하게 든든하다.


빅테크가 만드는 것과 내가 만드는 것은 같은 게임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양을 항해하는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있다. 나는 작은 강에서 쓸 배를 깎고 있다. 항공모함은 이 강에 들어올 수 없다. 수십 년 묵은 레거시 시스템, 표준화되지 않은 데이터, 사람들 머릿속에만 있는 암묵지—이건 범용 AI의 데모 영상에는 나오지 않는 영역이다.

그래서 아무도 풀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풀 수 있다.

물론 언젠가 그들도 이 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물길을 외우고 있을 것이다. 먼저 와서 삽질한 자의 이점이라는 게 있다.


'기본소득이 당신을 구하러 오기 전에'라는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AI가 대부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모두가 UBI에 의존하게 되는 미래. 디스토피아인지 유토피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절대 반지를 쥔 자들과 경쟁할 생각은 없다. 대신 그들이 만든 도구를 빌려서, 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아주 구체적인 문제를 푼다. 그게 지금 내가 찾은 생존 전략이다.

멸종의 전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야는 아직 밤이 아니다. 해가 뜨기 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