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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Strategy (AI 비즈니스 전략)

빈 사무실에서 마주한 질문: 스타트업 실패 데이터가 말해주는 ‘속도’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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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렸고 더 과감하게 투자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폐업 신고를 마친 24세 창업가 K가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잣말처럼 던진 이 질문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AI 프로젝트의 기획과 실행을 오가며 ‘빠르게’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을 매일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사가 먼저 결과물을 내놓으면 어쩌나, POC 일정이 밀리면 어쩌나—이런 불안은 스타트업뿐 아니라 기업 내 신규 사업 담당자에게도 익숙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270만 명의 창업가 데이터와 630만 건의 채용 공고를 분석한 두 편의 학술 연구는, 우리가 맹신해온 ‘속도 = 생존’이라는 등식에 균열을 냅니다. 오늘은 그 균열 사이로 비치는 빛을 따라, 제가 느낀 작은 깨달음을 나눠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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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천재’라는 미디어의 환상


기숙사에서 후드티를 입고 코딩하는 20대가 세상을 바꾼다—이 서사는 매력적이지만, 데이터 앞에서는 허구에 가깝습니다. 상위 0.1% 초고속 성장 기업을 일군 창업가의 평균 연령은 45세였고, 50세 창업가가 30세 창업가보다 같은 성과를 낼 확률은 1.8배 높았습니다.

저는 20년간 영어 교육자로 일하다 AI 분야로 전직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닌가’라는 불안이 컸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교단에서 쌓은 수천 시간의 커뮤니케이션 경험, 학습자 반응을 읽어내는 감각, 교육과정 설계 역량이 지금 AI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고객사를 설득하는 데 고스란히 전이되었습니다. 연구진이 ’산업 경험(Industry Experience)’이라 부른 이것은, 단순히 해당 분야에서 오래 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가속하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몸으로 아는 내비게이션을 장착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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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부르는 ‘채용’이라는 도박


경험이 부족한 창업가는 불안합니다. “경쟁자가 내 아이디어를 베끼면 어쩌지?“라는 공포에 시달리다가, 가장 손쉬운 해결책—사람을 뽑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데이터는 창업 후 12개월 이내에 관리자나 영업 인력을 채용해 조기 확장을 시도한 기업이 실패할 확률이 20~40% 더 높다고 경고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의료 AI 제안서를 준비하던 어느 밤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팀원 모두가 “빨리 전담 인력을 뽑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객사의 실제 니즈가 무엇인지, 규제 환경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먼저 검증하지 않은 채 조직을 키우면, 막다른 길에서 방향을 틀 수 없다는 직감이 있었습니다. 결국 작은 POC를 먼저 진행하며 가설을 검증했고, 그 과정에서 처음 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안서가 수정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인력부터 충원했다면, 이미 찍힌 품의서처럼 경직된 구조 안에서 피벗(Pivot)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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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이라는 느린 속도의 역설


연구는 A/B 테스트 같은 실험 도구를 적극 활용한 스타트업이, 설령 조기에 스케일링을 하더라도 실패 확률이 높아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돌다리를 두드리는 행위가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 결국 더 빠르다는 역설입니다.

의료 AI 프로젝트에서 저는 HL7 FHIR 연동 모듈을 직접 개발하기 전에, 간단한 프로토타입으로 병원 EMR 데이터가 실제로 어떤 형태로 떨어지는지를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 작은 실험이 설계를 세 번이나 바꾸게 했고, 결과적으로 본개발 일정은 단축되었습니다. ‘실험’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긋한 인상과 달리, 실험은 불확실성을 조기에 제거해 전체 프로젝트 속도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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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사무실에서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


K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 믿은 공식이 틀렸습니다.” 속도는 미덕이 아니라 조건부 전략입니다. 검증 없이 달리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도박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한계가 아니라, 돌다리를 두드려본 횟수의 총합입니다.

저 역시 여전히 마감에 쫓기고, 경쟁사 소식에 조급해집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다음에 “사람부터 뽑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 때, 먼저 “무엇을 검증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겠다고. 그것이 270만 명의 데이터가 저에게 남긴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조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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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본인이 속한 조직이나 프로젝트에서 ‘빠른 확장’에 대한 압박을 느낀 경험이 있다면, 그때 어떤 선택을 하셨고 그 결과는 어떠셨어요?

Q2. ‘산업 경험’이 창업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신규 분야로 전직하거나 사내 벤처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주는 실질적인 시사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